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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해화] 타래난초 꽃을 닮은 여자

靑岩거사 2006. 4. 3. 12:58


"뭐 그런 여자가 다 있당가? 잊어버리소"

<새벽에 쓰는 편지> 타래난초 꽃을 닮은 여자

김해화 기자 kimhaehwa@com.ne.kr
▲ 타래난초 ⓒ2002 김해화

한겨울에 뜬금없이 봄날 같은 날씨가 이어지더니 사흘째 궂은 비까지 내려 마음이 어수선한 저녁나절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창원의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나요, 그새 내 이름 잊어분 것은 아니겄재?"
"자네 전화 받으믄 한나도 안 반가운께 잊어부렀으믄 좋겄네."
"아따 서운허그만, 나는 형님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디 형님은 내가 왜 안 반가우까?"
"맨날 전화해가꼬 심란헌 소리만 해쌓는디 머시 반갑겄능가."
"어쩔 것이오. 사는 것이 그런디, 형님한테라도 신세타령 해야재 누구헌티 그런 소리를 헐 것이오."

"그러나 저러나 자네 집사람 일은 어찌케 되었능가?"

울산에 있을 때였으니 지난 해 여름이었습니다.
한동안 전화가 없어서 잊고 있던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애들 엄마가 사채를 써 갖고 사채업자들이 나한티 돈을 갚으라고 해쌓는디 어째야 쓰겄오?"

"자네 집사람 집 나간 지 오래 됐잖은가?"
"함안서 찾아갖고 데리고 왔는디, 몇 달 얌전허게 있드만 또 나가부렀소."
"뭐 그런 여자가 다 있당가? 잊어버리소."
"나야 백 번 천 번 잊어뿔고 싶재라. 그런디 아그들 헌티는 즈그 엄니 아니오."

"젖 묵는 애기를 내불고 통장까지 챙겨갖고 집 나간 어미도 어미당가?"
"그래도 아그들한티는 즈그 엄니재라. 그것은 그만두고, 집을 나가고 나서 소개소라고 헌디서 전화가 왔는디, 집사람이 거그서 사채를 썼다요. 내가 그 돈을 갚아주믄 집사람이 돌아올 것이라고 허는디 내가 그 돈을 갚아야 허것오, 그냥 냅둬부러야 허겄오, 형님 생각은 어쩌요?"
"자네 집사람이 그렇게 전화를 헌 것이여. 아니믄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헌 것이여."
"그 사람들이 그러재라."

"그러믄 자네 집사람이 돈을 썼는지 안 썼는지도 확실허지 않은디 왜 자네가 돈을 갚는당가?"
"그런께 말이재라. 그러믄 갚아주지 마까?"
"그것은 자네가 판단헐 일이고, 우선 그 사람들헌티 자네 집사람허고 직접 통화를 허고 싶다고 허소, 그래 갖고 그 사람들 말이 참말이고, 자네가 돈을 갚고 자네 집사람을 데리고 올 생각이 있으믄 그렇게 해야재, 그것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헐 일은 아닌 것 같네."
그 날은 그렇게 전화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나 그 돈 갚아줄라고 돈까지 만들어 놨는디, 그런디- 내가 왜 그 돈을 갚아야 허요?"
"이 사람아, 내가 그 돈을 갚으라고 했는가?"
"그러재, 형님이 그 돈을 갚으라고 헌 것이 아니재."
"자네 집사람이 그 돈을 쓰기는 쓴 것이여?"
"썼겄재라."
"직접 확인을 헌 것이여?"
"그런 것은 아닌디-"

전화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술취한 그는 돈을 갚을 수 없다느니, 그래도 갚아야 한다드니, 하면서 계속 횡설수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은 나는 그의 횡설수설을 계속 듣고 있을 수 없었지요.

"나 지금 일허고 있네. 돈을 갚고 안 갚고는 자네가 알아서 헐 일이고 그만 전화 끊어야겄네."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전화가 오고, 끊으면 또 오고, 그러다가 나무라면 이번에는 아이를 시켜 전화를 하고, 이만저만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현장이 너무 넓어서 휴대전화를 통해 작업지시가 오고가는 상황이라 전화기를 꺼버릴 수도 없어서 좀 심한 말로 나무라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서운했는지 그 뒤로는 전화가 없어서 한동안 걱정도 되고 했지만 내 삶을 지고가는 것도 너무 힘들다보니 그만 잊고 지냈지요.

오랜만에 그의 전화를 받자 먼저 가출을 밥먹듯이 해서 애를 먹이는 그의 아내 소식을 물었습니다.

"집사람 죽어부렀소."
"그것이 뭔 소리여."
"내가 형님헌티 전화 헌 것이 작년 여름이었재라. 글고 나서 얼마 안되어갖고 그렇게 되어부렀그만요."
"어찌케 된 일인디?"
"창원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디다. 약을 묵었는디 안 되야갖고 마산으로 옮긴다고-. 9월이었그만이라."
"안 되었네, 자네 맘이 많이 상했겄네."
"하도 속을 썩이다가 그렇게 된께 그러도 않습디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살 맞대고 살던 사람 아니요, 진동 가서 화장해 갖고 내 손으로 불모산에 뿌려줬소."

타래난초라는 꽃이 있습니다.
양지바른 풀밭에서 풀과 함께 자라는 꽃인데, 그 잎의 생김새가 잔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눈에 띄지 않다가 꽃이 피고 나면 비로소 아하-      여기 꽃이 있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하는 꽃이지요.

예전에는 논둑이나 밭둑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풀베기가 귀찮다고 제초제를 많이 쓰면서 귀해지더니 요즘은 오래된 무덤의 잔디 틈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 이삭모양의 꽃대가 나와 자잘한 분홍색 꽃이 비꼬여 올라가며 피는데 비록 꽃의 크기는 작지만 꽃빛깔과 생김새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그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미어져오고는 했습니다.

얼굴이 고운 여자라고 했습니다.
겉모습만 중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부자 사내 만났더라면 장미꽃처럼 활짝 피고도 남을 여자라고 했습니다. 어쩌다 노가다 사내 만나 비비꼬이기만 하는 세상을 살다가 스스로 자신을 꺾어버린 여자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꾸 타래난초라는 꽃이 떠올랐습니다.

그 동안 망가져가는 동료의 삶이 여자 탓인 듯싶어 한없이 밉기만 했는데 곰곰이 따져보면 술 좋아하고 병약한 사내의 노가다 살림살이 풀리는 일은 없고 꼬이기만 했을 테니 그 숨막히는 삶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도망을 쳤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마지막에 다시 돌아오고 만 그 여자는 타래난초 꽃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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