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공간/☆우리고장 명소

진도- 항몽 격전지 '남도석성'

靑岩거사 2011. 6. 27. 18:07

 

진도에서 중세를 느끼다.  남도석성

 

 

대몽항쟁의 격전지이자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녹아 들어 있었던 그 곳엔 시골마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 성곽을 걸으면서 포르투칼 오비두스 성곽을 걷는 느낌과 너무 흡사했던지라 괜시리 한국의 오비두스라 부르고 싶어 집니다.

 

 

 

남도석성은?

 

 남도 석성은 고려 원종 때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석성이라고 전한다.

 

고려시대 고종 이후 시작한 왜구의 침범이 연해 지방을 노략질 함으로써 충정왕 2 (1350)에는 진도의 관부와 백성들은 내륙 영암지방으로 옮겨 조선시대 세종 19(1437)까지 피난생활을 하다 다시 귀향한 것이다.이들 수군진들의 축성 연대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불리한 경상도 및 전라좌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1488 (성종 19)에서 1490(성종 21)까지 3년간에 걸쳐 축성되고 전라우수영 관하의 수군진들이 연산군 - 중종 연간에 축성된 점으로 미루어 볼때 성종 - 연산군 연간에 이 성이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도석성 본래의 규모는 그 둘레가 1,233, 높이가 8,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 그러나 영조때 석축 둘레 1,040, 높이 12자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성지가 거의 원형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동문, 서문, 남문터가 있다. 현재 성의 총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 성은 조선시대 수군진영의 진지로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남도석성에 있는 쌍교와 홍교는 석성의 외곽을 건너 다니기 위하여 축조한 것인데, 편마암의 자연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라남도 홈페이지 발췌-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건쌍교'였습니다.   

아치형의 쌍교는 곡선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다리로 선암사의 승선교에서도 발견되어집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건축기술이 아닌 자연과 그야말로 하나가 되는 건축미학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교풀로 바른것도 아닌데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 걸 보면 고도의 기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이 쌍교를 지나면 홍교가 있습니다. 이 두다리는 성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은 방어목적으로 이용된 해자입니다.

따라서 이 다리는 삼별초의 항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최후의 격전장소였던지라

이 다리를 건너 출전하는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야하는 눈물의 다리였을 듯합니다. -

 

이 다리를 넘어 전쟁터로 가야하는 사람들과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보낼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눈물과 한이 돌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을 것같은 생각이 코끝이 찡해옵니다.

 

 

 

입구의 누각을 통해 남도석성을 밟아 볼 수 있습니다석성안에는 옛시절의 돌담길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진도의 명물 진도개가 반가워합니다. ~ ~~ 완전 귀엽군요.. ^^

 

 

 

한국의 대표적인 사냥개인 진돗개는 1962년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해 보고하고 있으며

2005년 컨넬클럽(KC)과 세계애견연맹(FCI)에 정식 품종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진도에서 3대명물이라 함은‘진도 신비의 바닷길, 진도 홍주, 그리고 이 진돗개를 말합니다.

 

이 두 마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읽는 듯한 영민함을 발휘하더니 이런 포즈까지 잡아줍니다.

 

 

그럼 석성을 따라 본격적으로  걸어봅니다. 석성에서 보이는 소박한 마을 풍경입니다.  

석성을 따라 걷는 길은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네요~

 

 

 

 

왜 이 남도석성을 포르투칼의 오비두스에 빗대었을까 궁금하시죠...  

 

 

포르투칼 오비두스는(Obidos)?

 

 성벽에 둘러싸인 인구 800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계곡의 진주'라고 불리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로, 여름에는 색색의 꽃들이 처마 끝을 수놓는다. 오비두스의 역사는 로마 시대에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요새를 세운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이슬람교도에게 정복당하고 1148년에 아폰수 엔리케스에 의해 무어 인의 지배가 막을 내리자 도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1282년에는 오비두스를 방문해 완전히 매료당해 버린 왕비 이사벨에게 다니스 왕이 이 도시 오비두스를 선사했으며 이후 1834년까지 오비두스는 대대로 영황의 직할지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크지 않으면서도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오비두스 또한 ,

성이 원래 그렇듯 적들을 막기 위해 쌓았던 목적과 중세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선 흡사한 느낌을 받는 곳인 것 같습니다.

포르투칼의 오비두스 성곽이 어떤지 궁금해집니다.  

성곽위가 뚫려있는것과 다르게 담으로 둘려쌓여있습니다.

 

 

 

성곽에서 내려본 오비두스의 모습 , 성곽으로 인해 안과 밖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성곽안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비두스도 이곳 남도석성처럼 옛 중세가옥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지만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비두스보다는 규모도 훨씬 직지만 소박하고 정겹기로 따지자면 비할바가 못되는 듯합니다.

 

 

성곽을 따라 걸으니 전체적인 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석 사이에 뿌리를 내린 수 백년의 아름드리나무

 

 

성아래로 내려와 담벼락을 보니 아치형의 모습이 장관입니다.  어떻습니까? 포르투갈의 오비두스 석성과 닮은 것 같지 않나요?

 

 

 

다른 집과 달리 마을 정 중앙에 보니 '' 자 구조의 기와집 한 채가 복원중에 있습니다.

 

 

성의 끝부분에서는 바다가 보입니다.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수군진영지로 손색이 없었을 듯합니다

 

  

이 곳은 마치 어릴 적 시골집의 뒷 뜰 채전밭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성곽으로 인해 마을안과 밖의 경계가 확실히 구분되어지고 어릴적 살던 동네 같은 느낌이 물씬나고 있어 정겹디 정겹습니다. 또한 성의 둘레 짜투리 공간을 버리지 않고 다시 석성을 쌓아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엔 우리의 어린 시절 추억이 널부러져 있네요

 

 

포르투칼 오비두스와 묘하게 분위기가 닮아 있던 남도석성  

 

이렇게 석성을 한 바퀴 돌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격전지였던 역사적 아픔이 베여있던 곳은 지금은 고즈넉한 평화가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위해 흘렸을 눈물과 피맺힌 절규는 진도 구석구석에 살아 숨쉬고 있네요

진도를 여행하면 놓치지 말고 이 곳을 꼭 들러볼 것을 강추드립니다

 

 ★ 가는 방법

 ■ 위치 :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번지 (문의 : 진도관광안내소 061-542-0088)     

<지도>  여수에서 자가용으로 약3시간 30분소요